용서를 통해 평화를 찾음

익명
분노, 혼란, 슬픔에 휩싸인 나는 LDS.org에서 용서에 대한 기사를 찾아보기로 했다. 나는 교회 지도자들이 심각한 범법 행위를 경험한 후 어떻게 평화를 찾는지에 대해 말씀하신 것을 알고 싶었다. 검색 엔진이 내 요청 사항을 처리하는 동안 나는 그 괴로운 순간을 머릿속에 다시 떠올렸다. 배가 아려왔고 맥박이 빨라졌다. ‘도대체 어떻게 평화를 찾는다는 거지?’ 라고 나는 자문했다.
수십 개의 연차 대회 말씀이 이 문제를 다루는 듯했다. 나는 제임스 이 파우스트(1920~2007) 회장님의 희망적인 말씀을 클릭하여 재빨리 내용을 훑어내려 갔다.1 한 암만 지역사회는 암만 교도 여학생들을 총으로 살해한 정신착란을 일으킨 우유 배달원을 용서했다. 어떤 남성은 음주운전으로 자기 아내와 자녀들을 죽인 운전자를 용서했다. 이런 이야기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었을까?
이 문제를 생각하면서 나는 안절부절못하게 되었다. 이 이야기는 내 상황을 반영하지 못했다. 이 두 경우에 범법자는 죽었거나 즉각 기소당해서 피해자들은 계속되는 혹은 미래의 범법을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었다. 내 경우에는 범법자는 여전히 내 삶의 일부이고 죽거나 처벌받지도 않는다. 이 사람은 범죄를 저지르지는 않았으나 중요한 두 관계를 망쳐버렸다. 아직 회개하지도 않고 처벌도 받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범법이 또다시 일어날 때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나는 파우스트 장로님의 기사를 다시 읽고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놓쳤다는 것을 깨달았다.
- “용서가 …… 항상 즉각적인 것은 아닙니다.”2
- “우리 대부분은 고통과 상실을 극복하는 데 시간을 필요로 합니다.”3
- “용서는 ……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그분의 말씀을 믿는 신뢰를 가졌을 때 좀 더 쉽게 옵니다.” 4
- “우리가 무릎 꿇고 하나님 아버지께 용서의 감정을 간구한다면, 그분은 우리를 도와주실 것입니다.”5
이 진리 하나하나는 결국 평화를 찾게 될 것이라는 희망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나가게 해 주었다.
그날 저녁 나는 용서에 대해서 원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던 것에 생각했다. 즉, 용서란 전적으로 나를 화나게 한 그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하나님과 나의 관계를 회복하고 발전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그것은 진정으로 신뢰하는 것이었다. 즉 하나님께서 나를 염려하시며 그분은 결국 내 유익이 되지 않을 일은 일어나지 않게 하실 것이라는 신뢰 말이다. 용서는 하나님 아버지께 더 가까이 나아가며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를 이해하며, 모든 것을 제단에 내려놓고,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보살핌 속에 안전해질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기쁘게 용서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나는 안전해진다는 것이 이상적이고 스트레스 없는 삶을 영위하는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큰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하나님 아버지와 이야기할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삶의 위험을 경험하면서도 나는 사자 굴에 갇힌 다니엘처럼(다니엘 6장 참조), 골리앗에 맞선 다윗처럼(사무엘상 17장 참조), 왕 앞에 나아간 에스더처럼(에스더 2~7장 참조), 감옥에 갇힌 앨마와 앰율레크처럼(앨마서 14장 참조), 혹은 놋쇠판을 찾으러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니파이처럼(니파이전서 3~4장 참조) 안전해질 수 있다. 아빈아다이처럼 나는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화평과 사랑이 깃든 인도를 경험할 수 있었다.(모사이야서 12~17장 참조) 어떤 상황과 어떤 대화가 진행되더라도 하늘과 가까이 있을 때 나는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나에게 고통을 안겨준 그 사람을 피하거나 함께 교류할 수 있었다. 나는 구주께서 내 상황에 부닥치셨더라면 어떻게 사셨을까 상상해봄으로써 힘을 얻었다. 그분께 집중하는 길이 자유로워지고 용서할 수 있는 열쇠였다.
하지만 계속 집중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때때로 머릿속으로 범법이 되풀이되고 그것 때문에 고통스러운 감정이 되살아나 나는 끊임없이 부정적인 생각을 지우려 애써야 했다. 다시금 나는 파우스트 회장님의 가르침을 통해 도움을 받았다. “구주께서는 그분의 속죄를 통하여 소중한 평화를 우리 모두에게 주셨지만 이것은 우리가 분노, 악의, 또는 복수라는 부정적인 감정을 기꺼이 던져버릴 때에만 올 수 있습니다.”6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나는 빛과 희망, 기쁨에 집중할 방법을 모색했다. 나한테는 상처와 분노로 힘들 때 경전을 암기하는 것이 도움되었다. 이렇게 몇 주간 해보니 이사야 몇 장을 외울 수 있었고 고통스러운 범법의 기억이 덜 생각났다.
시간이 흘렀다. 내 금식과 기도에 대한 응답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내가 치유되도록 도와주셨다. 하지만 치유는 점진적인 과정이지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는 기적이 아니었다. 어떤 날은 평화와 용서하는 마음을 느꼈지만 어떤 날은 분노와 실망감으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 가까이 나아갔을 때 그분은 내가 그분처럼 생각하도록, 또 자비의 눈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그분이 바라보시는 것처럼 보도록 도와주셨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나를 아프게 했던 사람을 이해하고 동정하며 마침내 사랑하도록 도왔던 영의 속삭임을 경험했다. 과거를 완전히 잊고 평화를 찾았다고 말하기는 시기상조이지만 나는 예전보다 훨씬 더 하나님과 더 가까워진 것 같다. 그것은 매우 귀중한 축복이다.
파우스트 회장님은 연차 대회 말씀을 이런 간증으로 마무리하셨다. “저의 온 마음과 영혼을 다하여 ‘모든 사람을 용서[하라]’ (교리와 성약 64:10)는 구주의 훈계에 따를 때 우리에게 올 수 있는 치유의 힘이 있음을 [믿습니다].” 7 나는 이 간증을 나누고 싶다. 치유는 찾아오게 마련이다. 사실 내 경험상으로 보면, 구주께서는 예전의 좋았던 상태로 그냥 회복시킴으로써 영혼을 치유해 주시지 않는다. 그분께서 치유하실 때 자비롭게 치유 이상의 것을 해 주신다. 그분은 시련이 있기 전보다 우리가 훨씬 더 건강해지도록 만들어주신다. 그분의 목표는 우리의 행복과 평화이다.
용서는 여러분의 상처를 치유한다

“이해하기도 어려운데, 하물며 용서를 하기란 더더욱 어려울 수 있습니다. 비판을 자제함으로써 시작하십시오. …… 가해자를 징계하는 일은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십시오. 여러분 자신의 고통이 완화되고 있음을 느낄 때 가해자를 완전히 용서하기가 한층 더 용이해질 것입니다.
이미 행해진 일을 지워버릴 수는 없겠지만 용서는 할 수 있습니다. (교리와 성약 64:10 참조) 용서는 처참하고 비극적인 상처를 치유합니다. 왜냐하면 이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이 여러분의 마음으로부터 미움이라는 독성분을 말끔히 없애버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여러분의 의식 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복수심을 정화합니다. 용서는 마음을 순수하게 하고, 치유하며, 회복시키는 주님의 사랑을 자리 잡게 해 줍니다.
주님은 이렇게 권고하셨습니다.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를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너희를 업신여겨 이용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제3니파이 12:44; 강조체 추가)
비통해하고 증오하는 것은 해롭습니다. 그것들은 파괴를 낳습니다. 또한 여러분이 열망하는 구원과 치유를 더디게 합니다. 자기 합리화와 자기 연민을 통해 피해자가 가해자로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하게 하십시오. 여러분은 그분과 같이 심판할 수 없습니다.”
리차드 지 스코트 장로, 십이사도 정원회, “학대로 인한 비극적 상처를 치유함”, 성도의 벗, 1992년 7월호, 31~33쪽